작가노트
몇 해 전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의 과정을 목도하면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는 생각을 확신하게 되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 의미가 진심으로 와 닿게 된 첫 경험이었다. 삶의 유한성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간에 주목하게 되었다. 인간의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른다. 그 방향에 속박된 채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생의 하루 하루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인간은 끊임 없이 사유한다. 때로는 실수로 점철된 과거를 곱씹으며 후회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확실한 미래를 어림 짐작하며 근거없는 희망 혹은 불안의 감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 모든 사유는 현재의 나로부터 시작된다. 즉, 현재의 순간에 온전히 몰두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적은 것이다. 육신과 정신을 동시에 현재에 두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살아가다 보면 한번 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답 없는 물음을 갖는다. 지식의 습득과 경험적 근거를 토대로 사람마다 각기 다른 결론에 이르겠지만, 나는 온전히 현재에 몰두하는 행위를 통해서 그 의미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토대로, 현재를 이루는 ‘순간’을 포착하고 인상 깊은 것들을 수집하는 것이 내 작업의 과정이다.
‘영원한 순간들 Eternal moments’ 시리즈는 자연 속 사색의 순간들에 대한 연작이다. 나에게 자연은 영감의 원천이자 경외심의 대상이다. 무더운 여름을 식혀 준 비가 그친 후 하늘에 뜬 거대한 무지개, 노을 진 하늘, 거센 파도, 태풍에 거칠게 휘몰아치는 숲 등, 자연으로부터 포착되는 순간들은 나에게 작업을 위한 영감을 준다. 이를 토대로 우거진 숲, 물결, 풀의 군집, 잎의 형태와 문양 등 자연에 존재하는 요소들을 시각 언어로 표현한다. 그 곳에는 색면으로 얼굴이 가려진 인간들이 등장한다. 자연 속에서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재를 마음 껏 누린다.
‘뒤틀어진 세계 Twisted World’ 시리즈는 꿈 속의 순간들에 대한 연작이다. 현실로부터의 도피 끝에 도착한 뒤틀어진 세계는 복면 인간과 복면 개에게 불완전한 대피소가 된다. 이 시리즈는 나를 짓누르는 중압감에서 시작되었다. 그 때의 나는 현재에 몰두하기는 커녕 앞으로 벌어질 최악의 상황들을 상상하기에 바빴다. 이것이 지속되다 보니 눈 뜬 세상보다 눈 감은 세상이 궁금했다. 나에게 던져지는 무의식의 순간들은 스토리텔링이 되었고, 그렇게 뒤틀어진 세계가 탄생했다.
나의 작품에는 전반적으로 얼굴이 가려진 인간들이 등장한다. 색면으로 얼굴이 가려진 인간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유유자적 하는가 하면, 복면으로 얼굴이 가려진 인간이 뒤틀어진 세계를 정처 없이 유랑 하기도 한다. 이들의 나이나 성별 등은 관람자의 시선을 통해 그저 유추할 수 있을 뿐, 정보가 한정적이다. 이러한 익명성은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남들의 시선에 얽매일 필요 없이 그저 하고 싶은대로 자유롭게 존재하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순간을 만끽할 수 있게끔 한다.
작업의 주된 매체는 아크릴, 오일 파스텔 등의 회화 재료를 사용한 평면 작업이다. 2021년 현재는 그 동안 작업해온 평면 작업 방식 뿐 아니라 영상이나 2D, 3D 툴 등 디지털 매체를 이용하여 애니메이션, AR(증강현실)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작품 창작을 시도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작업 세계의 확장을 꾀하고자 한다.
작품을 통해 현재의 순간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는 사색의 장이 펼쳐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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